김구림(87) 작가는 미술대학에 입학했지만 1년 만에 '배울 게 없다'며 자퇴했다. 그 뒤 독학으로 미술 공부를 하던 작가는 캔버스에 사물을 그리는 식의 작업에서 별다른 의미를 찾지 못했고 기존의 미술·관습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작업을 시작했다.
1959년 유화 개인전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작가는 이후 비디오아트와 설치, 판화, 퍼포먼스, 회화 등 매체와 장르, 주제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작업해 왔다. 미술뿐 아니라 무용, 연극, 영화, 음악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에서 활동한 그를 두고 '총체예술가'로 부르기도 한다.
'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불리는 김구림 작가의 작품 세계를 폭넓게 살피는 전시가 25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막한다.
전시는 1950년대 후반의 평면 추상 작업부터 신작까지 230여점을 통해 자유롭고 거침없었던 작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1950년말∼1960년대초 한국 미술계에 앵포르멜(비정형) 미술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 김구림은 붓을 사용하지 않고 퍼포먼스 같은 행위로 비정형 화면을 만들어냈다. 패널 위에 비닐을 바르고 불을 붙여 석유가 묻은 부분이 불에 타면 담요 등을 이용해 불을 끄고 남은 흔적을 골조로 삼는 식이다. 작가는 이를 두고 '회화가 아닌 회화, 즉 그리지 않은 회화'를 만들기 위한 첫 시도라고 표현한다. 전시 출품작 '핵1-62'(1962), '질-62'(1962) 등이 이런 방식으로 제작된 작품들이다.
1968년에는 옵아트(착시 현상을 이용해 리듬감과 조형미를 느끼게 하는 예술)를 조형적으로 해석한 작품 '공간구조'를 선보였다. 작은 구멍이 뚫린 플라스틱 반구를 화면 위에 붙여 반복되는 리듬감 속 질서를 표현한 작품으로, 이후 반구의 구멍 속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전자예술 A','전자예술 B'로 발전했다. 한국 최초의 일렉트릭 아트로 불리는 이 작품들은 1969년 판매된 이후 소재가 알려지지 않아 이번 전시에는 '공간구조' 드로잉을 바탕으로 2013년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때 재제작된 작품이 나온다.
1969년 전위예술그룹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에 참여한 작가는 1970년 제1회 AG전에서 얼음을 주재료로 존재와 시간의 관계성을 표현한 '현상에서 흔적으로' 작업을 선보였다. 붉은 플라스틱 통 3개에 각각 다른 크기의 얼음을 넣고 그 위에 트레이싱 종이를 덮어둔 작품으로, 종이는 얼음이 녹으면서 물에 떠 있다가 물이 모두 증발하면 어그러진 채 남아있게 된다. 때가 묻은 탁자를 흰 천으로 닦아 천이 걸레가 되고 결국에는 닳아서 걸레 조각이 되는 긴 과정을 2분7초에 압축한 영상 작업 '걸레'(1974) 역시 시간성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관습을 벗어난 작가의 작품은 논쟁의 대상이기도 했다.
1973년 일본으로 건너간 작가는 백화점에서 구입한 식탁보 위에 걸레와 물의 흔적을 실크스크린으로 찍은 판화 설치작 '걸레'를 1974년 도쿄국제판화비엔날레에 출품했다. '판화는 복제예술'이라는 기존 관념을 뒤집은 작품으로, 이후 1981년 동아국제판화비엔날레에도 비슷한 작품이 출품됐지만 판화인지 아닌지 논란이 벌어지며 출품이 거부됐다.
1984년 미국으로 건너간 작가는 1989년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작업실을 옮기며 불타는 건물 사진과 주황색으로 칠해진 캔버스를 병치시키고 물을 상징하는 낚싯대와 물통을 함께 두는 '음과 양 91-L'(1991)처럼 캔버스를 분할하고 평면과 오브제를 조합하는 방식의 작업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후 2000년 영구 귀국한 작가는 석가모니나 해골처럼 이질적인 도상이나 폐기물을 이용한 오브제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우현정 학예연구사는 "1950년대부터 이어진 김구림의 전방위적인 활동과 거침없는 도전은 시대에 대한 반응이었고 관습에 대한 저항이었다"면서 "이번 전시는 그간 이론적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세계를 최대한 온전하게 전달하는 데 초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전시와 함께 김구림이 제작했던 영화와 무용, 음악, 연극도 다시 볼 수 있다. 한국 실험영화사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남은 '1/24초의 의미'와 작가의 첫 실험영화 '문명, 여자, 돈' 상영에 이어 1969년 작가가 직접 안무나 작곡하고 대본 작업을 한 무용 '무제'와 '대합창'(음악), '모르는 사람들'(연극)이 공연된다.
한편 이번 전시는 출품작 선정을 두고 작가가 미술관과 문화체육관광부에 불만을 제기하는 등 전시 준비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특히 1970년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을 염하듯이 흰 광목으로 묶었던 '현상에서 흔적으로' 작품을 재현하는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었다. 이 작품은 미술관 건물 외관 전체를 30cm 폭의 흰 광목으로 한 바퀴 두르고 천의 두 끝자락을 현관 앞 구멍에 매장하고 큰 돌을 얹어 미술관 전체를 묶은 것이다. 새로운 미술을 하기 위해 과거의 고리타분한 미술관은 관 속에 버리자는 의미의 작업이었지만 전시 당시 초상집 분위기를 낸다는 이유로 설치 26시간 만에 철거됐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이 작품을 재현하고 싶어 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작가는 이를 두고 24일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작심한 듯 공개적으로 미술관에 문제를 제기했다.
작가는 "당시에는 그 작품이 설치는 됐다가 철거됐지만 40년이 지난 오늘날 설치 자체도 못할 줄은 미처 몰랐다"면서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곳이 이런 곳인 줄 알았더라면 나는 이 전시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광목으로 미술관을 묶는다고 해서 건물이 손상되는 것도 아니고 왜 안 된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작가는 또 "이번 전시는 아방가르드한(전위적인) 작품은 하나도 없고 고리타분한 것들만 늘어놨다"면서 "새롭고 파격적인 작품을 보여주지 못해 죄송하다"며 우회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미술관은 이런 작가의 주장에 대해 전시장인 서울관이 등록문화재 375호인 옛 국군기무사령부 본관인 만큼 건물 외벽을 감싸거나 하는 경우 문화재청 등 관련 부서 심의가 필요한 사안이었지만 협의 시간이 부족했다고 설명했다.
류지연 국립현대미술관 현대미술1과 과장은 "이 경우 관련 부서와 협의가 필요하다"면서 "문제가 된 작품에 대해서는 작가가 전시를 2개월여 앞둔 올해 6월20일에 언급해 도저히 전시 개막에 맞춰 협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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