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말을 듣는 사람은 300년 만에 처음이에요. 이승과 저승을 자유롭게 오가는 고양이 묘묘입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가을밤, 경기 고양 서오릉 입구에 고양이 분장을 한 배우가 나타났다.
자신을 '숙종 임금이 아꼈던 고양이'라고 소개한 그는 "신의 정원길을 따라 살아있는 자의 발이 들어간다"며 신성한 땅의 주인에 고했다.
서쪽에 있는 다섯 기의 능(陵), 서오릉에서 특별한 밤 여행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지난 16일 관람객 30명과 함께 떠난 '서오릉 야별행'은 조선의 19대 임금인 숙종(재위 1674∼1720)과 왕비인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가 묻힌 명릉(明陵)에서 시작됐다.
헤드폰을 쓰자 바깥의 소음을 모두 사라지고, 고양이 '묘묘'의 목소리만 남았다.
"이곳 명릉에 가장 먼저 오신 분은 1701년 인현왕후님이에요. 이후 1720년 임금님이 돌아가시고 인현왕후님 옆으로 오셨죠. 그리고 언덕 넘어 인원왕후님까지 세 분이 계신답니다."
'묘묘'는 붉은 칠을 한 홍살문(紅箭門),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정'(丁) 자 모양 건물 등 조선왕릉을 이루는 구성 요소와 특징을 설명한 뒤 관람객들을 능 가까이 안내했다.
그러자 귓가에서는 마치 사극을 연상시키는 라디오 드라마가 흘러나왔다.
숙종이 '오늘부로 중전을 폐위할 것을 명한다'고 하자 신하들은 국모를 함부로 바꿀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현왕후가 느꼈을 답답함, 서러움 등은 대사로 생생히 전달됐다.
바깥의 변화는 능으로 이어지는 경사면의 빛뿐, 귓가에서 펼쳐진 밤의 드라마였다.
이후 명종의 아들인 순회세자(1551∼1563)와 공회빈 윤씨가 묻힌 순창원(順昌園)을 지나 어두운 왕릉 숲길을 따라 한참 걷자 희빈 장씨의 무덤, 대빈묘(大嬪墓)가 나타났다.
숙종의 총애를 받으며 왕비에 올랐지만 끝내 폐위된 장씨는 '서오릉 길 중에 가장 좁고, 볼품없는 데 굳이 오셨소'라고 말을 건넸다. 대답하는 이 없이 헤드폰 너머로만 전해진 독백이었다.
무덤 앞에서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그녀를 표현한 듯한 춤사위가 펼쳐졌다.
발걸음을 옮겨 사후 왕의 호칭을 받은 덕종(1438∼1457)과 소혜왕후의 무덤인 경릉(敬陵)에서 그림자극과 왕의 어진(御眞·왕의 초상화) 영상까지 보자 어둠은 더욱 짙어졌다.
밤의 적막함을 느끼며 도착한 곳은 익릉(翼陵).
숙종의 첫 왕비인 인경왕후 김씨를 모신 무덤 주변으로 반딧불이 조명과 레이저를 활용한 '빛의 숲'이 펼쳐지자 참가자들은 절로 감탄하며 오색찬란한 빛을 사진에 담기에 바빴다.
서오릉을 관리·감독하는 능참봉의 숙소이자 제사를 준비하던 공간인 재실에 돌아온 시간은 어느덧 오후 9시. 길잡이 '묘묘'는 "이제 이승으로 돌아갈 때"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지난주 수원 화성에 이어 조선왕릉을 배우고 싶어 왔다는 초등학교 2학년 정슬찬 군은 "서오릉은 처음인데 고양이가 내는 퀴즈를 맞히며 걷는 게 재밌었다"고 말했다.
김희정 한국문화재재단 활용진흥팀장은 "평일 일부를 제외하면 행사 대부분이 매진된 상황"이라며 "'창덕궁 달빛기행', '경복궁 별빛야행' 등에 버금가는 문화유산 활용 프로그램으로 키워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서오릉 야별행은 오는 22일까지 하루 3차례씩 열릴 예정이다.
서오릉을 비롯한 조선왕릉 9곳에서는 주말까지 '조선왕릉문화제' 행사가 이어진다.
여러 프로그램 중 1437년 세종(재위 1418∼1450)의 천문 관측 기록에서 영감을 얻은 공연 '노바스코피1437'는 20∼22일 사흘간 경기 여주 영릉에서 만날 수 있다.
공연에서는 400대의 드론이 화려한 빛을 내며 가을밤을 수놓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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